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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속 삶의 풍경 - Lifescape in Art

  • 전시기간 2010-03-23 ~ 2010-05-30
  • 전시장소 1,2전시실 및 로비
  • 전시작품 평면, 입체, 설치, 미디어
  • 참여작가 권순관, 김기라, 김수진, 김정희, 김진기, 김형관, 김홍식, 김희선, 노세환, 박상희, 박승모, 이김천, 이배경, 이상원, 이원석, 임영숙, 장양희, 최태훈, 하영희 (총19작가)

 

" 미술, 인간과 사회를 보는 거울 " 


요사이는 불황으로 한 풀 잦아들기는 했지만, 엄청난 가격에 경매가 이루어진 국내외 미술품에 관한 소식이 심심치 않게 전파를 타기도 하고, 미술품이 새롭고 유망한 ‘재테크’ 수단으로 평소 미술에 그다지 많지 않았던 이들의 이목을 끌기도 합니다. 서점엘 가 보아도, 미술서적 코너에는 미술이라는 ‘고상한’ 수단을 통해 재산을 늘리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늘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환수단인 상품이라는 측면에서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미술이 큰 관심을 받은 예는 드물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결국 우리의 삶이 그만큼 경제적으로는 넉넉해졌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세인의 주목을 받기 이전에도 미술은 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술’하면 떠올리는 미술관이나 전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그런 미술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있는 수많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상의 가구며 옷, 집과 실내장식, 길거리에서 만나는 간판과 상점 등 그 모든 하나하나가 미술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또한, 데이트에 나서는 아가씨가 아침에 화장을 하고, 화장에 맞는 옷과 구두를 고르고, 남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산 후, 평소 점찍어두었던 예쁜 카페에서 만나 세련돼 보이는 메뉴를 주문하는 모든 것이 미술과 관련된 행위입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선택이나 호, 불호의 표현이 모두 소위 ‘미적 활동’의 하나인 것입니다.


사실, 미술은 인류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미술 뿐 아니라, 음악과 무용 등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미술(예술)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즉 인간을 규정하는 특성 가운데 하나로 일컫습니다. 하지만 먼 옛날 선사시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처럼 아름다움을 즐기고 여가를 뜻있게 보내기 위해 미술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위험한 동물과 험한 자연을 피해 먹을 것을 찾아 살아남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웠을 그들은 왜 그런 미술품들을 만들었던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상상을 해볼 수 있겠지만, 그러할 만큼 미술이 그들의 삶에 절실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살기도 바쁜 와중에 엄청나게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일이란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산과 들에 열매와 과일이 풍족하고 사냥할 짐승들이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일 해가 뜨지 않거나 따뜻한 시절이 다시 오지 않으면 낭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술에 자신들의 바람을 담았습니다. 사냥감은 늘 풍성하고 해는 다시 떠올라 대지를 밝고 따뜻하게 비춰주기를 빌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염원하는 대상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를테면 들소를 한 마리 그리는 것을 실제 사냥에서 들소를 잡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주술(呪術)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미술은 우리 조상들의 절실한 삶의 의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시간을 내려와 우리나라 고대회화를 대표하는 미술품 가운데에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에 있는 《안악3호분》은 4세기 중후반에 축조된 왕, 혹은 그에 비견되는 인물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무덤 안에는 당시 고구려 사회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화들은 묘주(墓主)와 부인의 모습은 물론이고, 생전에 그들이 살았을 삶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 가운데 부엌에서 불을 때 음식을 하는 모습, 우물에서 물을 긷고 디딜방아를 찧는 하녀, 고기가 즐비하게 걸린 육고(肉庫), 마차들을 세워둔 차고 그림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호화로운 주택에 고급 자동차들, 그리고 온갖 풍요로운 살림을 갖추고 사는 모습입니다. 이는 묘주가 생전의 삶을 죽어서도 계속 누리라는 뜻으로 그려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오히려 잘 알려진 이집트 피라미드 속 벽화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왕, 또는 귀족의 생활은 물론이고, 당시의 복식(服飾), 주방의 모습과 기구, 마차의 형태를 비롯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진이 남아있을 리 없는 고구려의 문물을 복원하는 정보의 샘인 것입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문물과 풍습도 그러하지만, 그림은 당시의 종교, 사상, 사회제도, 풍습, 가치관 등과 같이 보이지 않는 문화 전반의 정보도 제공합니다.

이러한 정보제공 역할은 풍속화나 기록화처럼 대상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미술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 속의 사물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구체적인 것을 확인할 수 없는 소위 추상미술을 통해서도 그것이 만들어진 연유가 되는 당시의 미술관(美術觀)은 물론, 당대 사회의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철학과 사상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술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추적해보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미술은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자 거울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미술가가 제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져 초연한 삶을 살더라도, 그러한 삶과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은 생각 자체가 그 시대의 산물인 것입니다.


미술의 이러한 기능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최근에야 비로소 미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미술을 생활 속에 이끌어 들이려는 노력을 더하고 있지만, 미술은 우리가 미처 관심을 주지 못했을 때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담아왔던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반대로, 생활 속에 스며있는 미술로서 뿐 아니라 미술관과 전시장을 위해 만들어진 미술도 그러합니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동시대 미술이 통상 우리가 미술이라고 여겨왔던 모습을 벗어나 복잡하고 난해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그만큼 우리시대가 미술 자체에 대한, 그리고 미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풍부하고 복잡해졌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의 사회와 급격하게 변화한 오늘날의 사회, 그리고 그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기술을 비교해 본다면, 미술의 변화에 대해서도 수긍이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선사인들이 만들어 오늘날 전해지는 미술품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미술이라는 인간 활동과는 개념도 의미도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그림이나 조각은 미를 추구하는 오늘날 인간 활동의 산물인 미술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면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범주도, 무엇을 미술품이라 부르느냐도 달라집니다. 일예로 사진이 미술로 인정받은 것도 오래지 않은 일이며, 오늘날 누군가가 영화나 만화를 예술이 아니라고 단정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모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신춘과 함께하는 《미술 속 삶의 풍경》전은 그렇게 복잡다단해 보이면서도 태생적으로 인간의 삶을 담는 정신활동의 산물인 미술 속에 나타나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전시합니다. 이번 전시는 우리의 삶을 보다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첫걸음을 시작한 미술관으로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보는 수많은 창들 가운데, 대상을 구체적 재현하고 모방하는 가장 전통적인 창으로부터 미술의 기능과 역할을 하나씩 음미해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작품들은 작가들의 눈에 비친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지금의 모습을 가감 없이, 또는 따뜻하게, 혹은 냉철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펼쳐진 삶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동시대인들이 가진 인간과 삶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시선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풍경은 우리의 시각을 통해 무수히 많은 정감과 의미를 다시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풍경 속에 비친 모습이란 내남 없는 우리임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미술관은 미술을 통해 세계를 보는 수많은 창을 제공합니다. 밑에서 보면 원으로,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원뿔처럼, 미술의 창들은 세계의 모습을 저마다 달리 보게 합니다. 하지만 그 창들마다 보여주는 서로 다른 모습들이란 결국 세계라는 실체의 서로 다른 상(image)인 것입니다. 그것이 미술의 참모습이자 인류의 역사에 미술이 함께 해온 의미이자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 전시 또한 미술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하나의 창을 여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0. 3.

                                                                                                                                                                                             학예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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