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립미술관은 제19회 장두건미술상 수상작가 신미정의 전시《세 개의 목소리, 드러나는 세계》를 연다. 장두건미술상은 포항 미술문화의 초석을 다지고 한국 구상회화 영역에 뚜렷한 성과를 남긴 초헌 장두건(草軒 張斗健, 1918~2015) 화백의 예술 업적을 기리고, 차세대 미술가들의 등용문으로서 지역 미술문화 발전을 위해 2005년 제정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제19회 수상작가 신미정(1983-)은 경북 포항 출생으로, 강제 이주나 추방, 피난 등 거대한 힘에 의해 자신의 장소를 상실한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특히 해방과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에서 잊히거나 지워진 개인의 삶과 회복하지 못한 물리적 · 정신적 공간을 주목한다.《세 개의 목소리, 드러나는 세계》에서 소개하는 세 점의 작품은 작가가 정체성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초기작부터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을 확장한 작업, 그간의 장소성에 대한 고민이 집적된 신작이다.
신미정은 2014년 폐공장에서의 첫 개인전 중 일어난 도난사건의 증거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노동자의 흔적으로부터 ‘장소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것은 폐공장 속 버려진 사진과 편지였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힘과 그것으로 밀려난 삶이 있었다. 이후 신미정은 자신 또한 작가로 생존하기 위해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며 정착하지 못한 사람들과 장소를 발굴해 왔다. 바로 이 전시에서 소개하는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에서 태어난 ‘타무라 요시코’의〈식민지/추억〉(2015), 도시개발로 인해 고향을 잃은 밤섬 실향민 ‘이일용’의〈율도(栗島)〉(2020), 아시아 국가 경계를 넘나들며 이주해 온 대만계 화교 ‘김성정’의〈타이완, 타향 그리고 타자〉(2023)가 그러하다.
작가는 과거의 개인사를 오늘날 공통의 관심사로 끌어내는 실천으로 예술을 수행한다. 이때 이주민의 역사를 다루며 특정 시대와 인물을 동일시하거나 피해자의 서사로 상처와 트라우마로 전형화하지 않고, 당사자로서 한 개인의 삶 자체를 마주한다. 거기에는 장소와 사람, 역사와 기억이 깔려있다. 작가가 말하는 장소는 어떠한 위치나 자리와 같이 지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장소란 자신의 존재 의미인 정체성을 대변하는 곳으로, 누군가와 함께한 역사와 관계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우리 사회가 경계 지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정체성을 국가적 · 지역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작가는 국가적 · 정치적 권력에 의해 이주한 사람들과 그 삶에서 나타나는 정체성과 경계에 관한 문제에 접근한다. 그리고 현지인과 이방인, 떠남과 귀환, 이주와 재이주의 기록 안에서 역사적 서술로 밝히기 어려운 삶의 풍경과 목소리를 드러낸다. 장소와 삶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기억을 더듬어 그려낸 고향마을 지도, 그 땅에 머무른 사람들의 사진, 이주민으로 살아온 일평생을 기록한 자서전에서 들려온다. 작가가 전시장에 불러낸 목소리는 사라진 장소와 머무른 사람들의 존재 의미를 그려보게 한다.
‘타무라 요시코’, ‘이일용’, ‘김성정’. 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난 세계는 그 어느 국가의 언어로도 특정할 수 없는 장소이자 이제는 닿을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민족적 근원과 현재의 터전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일구어낸 삶이자 사람들이다. 이렇듯 신미정의《세 개의 목소리, 드러나는 세계》는 우리 사회 속 보이지 않는 권력과 그 권력이 개인의 삶을 관할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하며,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 속 정체성이란 무엇일지, 앞으로의 정체성은 어떤 의미로 유효할지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