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화가의 증언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는 파이터다, 복싱 경기장에서나 캔버스 위에서나. 이 거구의 예술가가 맞서 싸우는 대상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자에게 하늘의 빛이 드리울 때 생겨나는 것이다. 몸을 지닌 자를 두고 대지와 세계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벌어지는 순간, 대지의 끝 모를 심연이 비로소 가시화되는 존재론적 사건이 바로 그림자인 셈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화가는 순간순간 자세를 바꾸어 가며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잡히지 않은 채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림자와 결투를 벌인다. 그가 명민하게 포착하려는 것은 이 대결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찰나이다. 마치 예언자 엘리야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탁을 전하듯, 스체파노비치는 캔버스 위로 가히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며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을 거침없이 증언한다.
소프트웨어 기업의 알고리즘에 잠식된 정신,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질주, 도처에 난무하는 폭력과 전쟁.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이러한 거대 구조는 스체파노비치의 화폭에서 팝 아트의 에토스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익숙한
대중매체 속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전장(戰場)과 시장(市場)에 내몰린
아이들의 처연한 눈빛은 여전히 순수하고, 쓰레기 더미가 나뒹구는 뉴욕의 번화가에도 성모자(聖母子)는 강림한다.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번영과 파멸 – 얼핏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이 실은 서로 얽혀 하나의 별자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진실을 화가는 드러내 보인다. 예술작품은 땅과
하늘, 필멸의 존재와 불멸의 존재를 한 자리에 불러들여 세계를 생성하는 진리 사건이라고 하이데거는 규정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스체파노비치는 이러한 예술의 본성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마지막 수단이라 여기며 기꺼이
전사가 되어 악마의 놀음에 일격을 가한다.